남산

2014/01/15 03:21

느낌 좋은 아침이었습니다
어제부로 앨범에 들어갈 곡들 스케치 작업을 마무리 했기 때문일거에요
큰 스트레스 하나를 덜어냈다는게 몸으로 느껴졌어요 오랜만의 가뿐한 기상

너저분한 방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고픈 강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래 내가 요새 정말 너무 집에만 있었지
희열형 작업도 바쁜건 거의 지나갔고 심지어 이번주는 녹화가 연달아 있으시니 날 찾는 사람은 없다
가사를 쓰러 어딘가로 떠나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습니다
오늘 하루는 나의 삶에 단 한번 뿐인 멋진 날이 될꺼야 오예
백팩에 노트북과 헤드폰을 챙기고 이제껏 만든 데모 음원들을 정성껏 모아 넣고서
집을 나섰습니다

일년 전쯤 이사한 이후론 어딘가의 옥상에 올라본 적이 없다는걸 깨닫고
남산 타워를 가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온 서울을 내려다보며 멋진 가사를 쓰는 내 한 손엔 따듯한 아메리카노
완전 멋질거 같아 완전 멋쟁이 뮤지션 (코피)

동대입구에서 순환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길
불길한 표지판이 절 환영했습니다
산 전체가 금연구역이라고
아 뭐 그정도야 상관없어
(두시간 후 난 산기슭을 헤메고 있음)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만난건 단체 관광 버스들이었습니다
잠깐 한눈 팔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중국 관광객들과 일행이 되어있었다
(심지어 누군가 가이드 같은 사람이 중국어로 뭔가 설명하는데 그걸 듣고 있었음)

여차저차 언덕을 올라 도착한 타워 일층의 카페는
방학을 맞은 동심으로 물들어
아이들과 어머니들은 마치 인터셉터와 캐리어 한부대를 보는듯 했습니다
이건 내가 상상했던게 아닌데
하는수 없이 피같은 구천원을 내고 전망대로 올라갔습니다

이야 서울 진짜 넓다
저기가 용산이고 저게 동호대교네
황사마스크 꼭 사야겠다 중얼중얼

하지만 전망대 카페도 역시 앉을 자리는 없었고
결국 한층 아래 경치 좋은 고급 한식 레스토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분이십니까 한명이요
커피 한잔이 구천원이라는 사실에
티나지 않게 속으로만 경악하고 주문을 했습니다
자 이제 슬슬 가사를 써볼까 노트북을 꺼냈는데
왜지
왜 콘센트가 없지
아 맞다 레스토랑이지..

켜자마자 꺼지는 노트북을 걍 열어놓고
정말 아끼고 아껴 커피를 마셨습니다
컵까지 씹어먹을 기세였는데
아랫배에 신호가 왔음

노트북을 자리에 두고 갈 수가 없어
가방에 넣어 메고 화장실 찾아 나서는데
'아 손님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환한 미소)'
아 아뇨 잠깐 똥싸러.. 라고 차마 말을 못함
그대로 계산

내려오니 날이 더 추워진것 같습니다 (속이 비어서)
이대로 이렇게 나의 오늘이 흘러가는건 말도 안돼 라며
걸어서 하산을 파격 강행했으나
코가 떨어질것 같아서
남산 도서관으로 피신

몸을 좀 녹이고 나니 니코틴 생각이 간절해져
근처의 안중근의사기념관*까지 흡연구역을 뒤지고 다녔으나 정말 없더군요
이 산 전체가 금연이다
나무를 헤집고 산기슭이라도 들어가면 몰래 피울곳이 있을까 싶었는데
대체 왜인지 산 속 곳곳에 할아버지들이 산책하고 계셔서 좌절
다시 남산 도서관으로 피신

마음을 다잡고
그래 오늘은 오래간만에 마음의 양식인 책을 볼 운명이었던 거야
자연과학서적 쪽을 뒤지다 음향학 책 뽑아들고
열람실에 앉았습니다
오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
맞은편의 여성분이 흠칫 놀라는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애써 무시하고 책에 집중하려 했으나
점점 더 장엄해지는 사운드
이것이 공명이구나 이것이 음향학..

책 꽂아놓고 지하로 내려가니
구내식당에서는 돈까스를 팔고 있었습니다
사천원인데 양도 푸짐하고 바삭하니 정말 맛있더군요
후드를 눌러써서 어느새 떡진 머리
어딘가 모르게 풀린 눈
누가 봐도 저는 토익 준비하는 취준생이었겠지요


결국 가사는 한줄도 못썼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은 캄캄해져 있습니다
누군가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냈길래
전 그냥 남산 가서 남산 왕돈까쓰 먹고 오는 길이라 했습니다


절 반기는 하트게임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새삼 고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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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