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동행자의 배려

2015/02/03 01:31
기차 여행이 잦다보니 나름 어느 정도는 기차 에티켓이 갖추어졌다고 감히 자부하고 있다. 건방진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 비행기를 자주 타는 사람들은 확실히 비행기 안에서의 행동 요령이 더욱 야무지지 않은가. 기차 여행은 에티켓의 잔기술이 오히려 많은 편이라 생각한다. Wall-E에서의 인간들처럼 가만히 앉아 밥먹고 잠자고 영화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도 잦고 승하차도 여러 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휴먼 인터랙션이 많다. 좁은 객석 복도 안에서 마주 오는 사람을 피함과 동시에 앉아 있는 승객에게 백팩이 부딪히지 않게 미꾸라지처럼 살살 몸을 돌리는 방법이라던가. 체득한 기술들이 많다. 남에게서 느꼈던 불편함에서 비롯된 요령들이다.

길어야 몇 시간을 함께 앉아 가는 익명의 옆사람과의 에티켓도 참 중요하다. 옆에 누가 앉아 있을 때는 가운데의 팔걸이에는 절대 팔을 올리지 않는다. 고속전철 팔걸이는 너비가 1U(?) 밖에 안 되어서, 옆사람과 몸이 안 닿게 해주는 일종의 파티션일 뿐이라 생각한다. 둘 중 한명 밖에 팔을 올릴 수 없을 뿐더러, 팔을 올려 놓으면 팔이 그 쪽 몸에 닿잖아. 모르는 사람과 몸이 닿은 채 여행하기는 마음이 영 불편하다.

기차여행에서 가장 민감한 순간은 아마도 식사시간일 것이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식사 후 탑승한 사람, 식사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기차 안에서 먹기로 한 사람. 이 세 유형 중 식사하지 않은 사람과 기차 안에서 먹기로 한 사람이 만났을 때 서로 말 없는 갈등이 시작된다. 도착해서 식사해야지, 마음 먹은 사람은 음식 냄새를 맡았을 때 정말이지 무아지경이다. 향을 맡다 보면 배가 너무 고파 꾸루룩 소리가 철길의 덜컹거림보다 크게 들려온다. 특히 열차 도시락은 특유의 향이 있어서, 톡 쏘는 마늘 내음이 식욕을 돋우기에 그만이다 (막상 먹어보면 그 특유의 향은 밤에 잠 들때까지도 입 안에서 맴돈다). 배고픈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힐끗힐끗 밥과 반찬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부러운 듯 지켜보게 된다.

오늘 탔던 기차의 나의 예약석에는 한 아주머니가 앉아 계셨다. “여기 제 자리입니다”라며 창가 쪽으로 밀어내고 앉으니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군인이 내 자리에 앉아서 잠을 자고 있으면 차간의 보조의자에 가서 앉아 있는 편인데, 워낙 빈자리도 많아 내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중간에 누가 타서 날 또 밀어낼 지도 모르니. 기차가 출발하자 식사를 꺼내 드시기 시작하셨다. 아, 향기롭다. 김에 살짝 발려진 참기름의 향기.

나는 테이크아웃 푸드를 들고 기차를 타면 주로 기차 출발 후 보조의자에 가서 바닥에 늘어 놓고 (-_-) 먹거나 식당칸이 있으면 거기에서 먹고 온다. 옆 자리 분께서 식사를 안 하셨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도시락은 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이 매력이니 어쩔 수 없지만… “식사하셨어요?” 김밥을 드시던 옆 자리의 아주머니가 내게 문득 말을 거셨다. “아뇨, 대전에 가서 친구들과 먹기로 해서요.” 미안하셨는지 김밥을 오물오물 드시며 아주머니는 슬쩍 내게 모듬 견과류 한 포를 건네주셨다. “고맙습니다 하하” 받아서는 커피를 올려 놓은 좌석 트레이에 같이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타임지가 선정한 슈퍼푸드 3가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써있는 엄청난 '슈퍼' 세트다. 하지만 먹지는 않았고, 그대로 내릴 때까지 그냥 두었다. 여러가지 일로 마음이 분주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폭풍 같은 하루를 보내고 막차 근처의 차를 타고 서울에 돌아와, 집에서 코트의 주머니를 비우다보니 모듬 견과류 한 포가 딸려나온다. 종일 잊고 있던 그 아주머니가 문득 떠오른다. 패키지가 참 따땃하다. 당연하지. 내가 하루 종일 품고 있었으니. 그런데 좀 다르다. 오랜만에 기차에서 느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배려의 온도다.

어느 겨울엔가, 귤에 유난히 마음을 빼앗겨 기차를 탈 때마다 - 다소 비싸지만 - 5개 들이 귤을 사서 타던 때가 있다. 따뜻한 객차 내에서 먹는 시원한 귤의 시큼한 맛도 좋지만, 옆 사람에게 한두개 나누어주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던 때가 있었다.

다음에 기차를 탈 때는 귤을 사서 타야지.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익명의 동행자가 되어 주어야지. 아주머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