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

2017/08/25 16:00
올 봄 후배의 결혼식을 보러 양평에 갔다가
(좀 특이한 1박 2일의 결혼식이었다. 신부가 프랑스인인데 그쪽에서는 결혼식을 며칠씩도 한다고)
원래 축가 반주를 하기로 한 친구가 결석하는 바람에 급하게 반주를 부탁받아 기타를 치게 됐다
사회를 맡은 사람은 서글서글하고 키가 큰 브라질 남자였는데
심심했는지 나에게 와서 괜히 헤이 아이 헐드 유아 패이머스 기타리스트 인 코리아 롸잇?이러며 주절주절 말을 걸었다
허허 노노 낫앳올..나이쓰 투 미츄..굿굿 오케오케 곧이어 삑사리 이백개 시전.. 노래모름

페이머스는 둘째치고 나는 스스로를 기타리스트라고 하는것이 좀 쑥스럽다
'기타를 친다', '기타에 신재평' 이라고는 쉬 말하곤 하지만  '기타리스트' 라는 단어에는 왠지 오분짜리 속주 솔로 정도는 애드립으로 쳐야만 할것 같은 느낌이 있지 않은가

어릴적에 취미로 기타 칠 적에는 이것저것 카피해서 할 줄 아는 곡도 많고 동아리에서 시키니까 어려운 기타솔로도 연습해서 치고 그랬는데 오히려 데뷔한 후에는 페퍼톤스 말고는 칠 줄 아는 레파토리가 없어졌다
4-5집 쯤에는 좋아하는 톤도 어느정도 가닥이 잡혀서 텔레캐스터에 복스ac30 이나 펜더 진공관 앰프 이외에는 별로 관심도 안가지게 되었다
한우물만 파니까 팬심이 가상했는지 펜더쪽에서 로컬아티스트로 지원해줘서 이젠 아예 한동안 다른 기타를 칠 수도 없다
그렇게 다른 기능들은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레이블 공연만 없었더라면

안테나 레이블 공연에 필요한건 저마다 각각 다른 음악을 하는 열팀의 반주를 해내야 하는 일류 세션맨이다 그야말로 '기타리스트'다
나는 턱없는 실력으로 버거운 역할을 맡아 온갖 서툰 짓들을 하고 있다
평소엔 잘 보지도 않는 악보를 보고, 생소한 코드들을 잡고, 곡마다 여기저기서 페달을 밟고, 솔로를 치고 빠지고, 마디수를 세고, 훵크를 쳤다가 아르페지오를 치고
만약 레이블 식구가 아니라 가혹한 세션맨의 세상이었다면 영원히 낭떠러지에 매장당했을 실수들을 저지르며 어찌어찌 위태롭게 연주를 해내고 있다
매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위안이 되는점은 나만 이러는건 아니라는거

암튼 이번 레이블 공연때문에 미국 비자를 신청하면서 직업란에 머쓱하지만 기타리스트라고 적었다는 얘기다
(평소에는 콤포져라고 적는데 사실 이 또한 매번 낯이 약간 뜨겁고, 싱어는..캬캬캬.. 대체 내직업은 뭔지)
한달간의 지옥훈련이 어느덧 끝나간다 올해도
당분간은 급한 축가 반주를 부탁받아도 절대 거절할 생각이다

sayo